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륵 신앙 (문단 편집) == 한국 == [include(틀:한국신화의 신들)] 하생신앙이 주류를 이루는데 특히 세상이 혼란할 때 현실 도피적인 성향으로 크게 흥했다. 미륵신앙이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퍼진 건 6세기 무렵 [[삼국시대]] [[백제]]에서부터로 보인다. 이때 백제에서는 미륵사, 미륵불광사(彌勒佛光寺) 등의 절이 세워졌고, 미륵반가사유상의 제작이 성행하였다. 미륵선화설화(彌勒仙花說話)에 의하면, [[위덕왕]] 때 신라의 승려 진자(眞慈)가 미륵화신(彌勒化身)을 직접 뵙고자 [[웅진성]]의 수원사(水源寺)를 찾아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초기의 미륵신앙이 현 [[공주시]] 일대를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해 퍼져나갔을 가능성을 시사한다. 이후 삼국 전체적으로 미륵하생신앙이 널리 유행하게 됐는데, 왕즉불사상과 연계하여 앞으로 올 부처=왕이 누구냐가 중요해졌고 이 영향으로 신라에서는 [[선덕여왕]]이 즉위했다. 또한 어느 나라에 미륵이 내려오느냐를 두고 삼국 사이에서 쟁탈전이 발생했다.[* 사실 56억 7천만 년 설은 미륵하생에 대한 여러 설 중 잡심론에 기초한 설로, 초기경전인 증일아함경과 대승불교 경전인 화엄경에 기초한 설에서는 불멸 3000년 뒤다.[[http://compassion.buddhism.org/main5/1100.htm|*]] 남방불기 기준으로 2015년은 2599년이고, 지금은 공식적인 곳에서는 쓰이지 않는 북방불기 기준으로는 3041년이다.] [[서동요]]의 주인공인 [[무왕(백제)]]과 [[선화공주]]의 미륵사 창건 설화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. 신라에서는 선덕여왕이 미륵불의 현신으로 여겨지면서 미륵이 점차 여성화되어 가기 시작했는데, 금동미륵[[반가사유상]]이 선덕여왕의 자화상적인 작품이라는 설도 있으나 출토 지역 논란 때문에 확정짓기에는 애매하여 정설은 아직 없다. 삼국시대의 미륵신앙은 천신 신앙/용신 신앙 등의 토착신앙과 결합/흡수하여 인간의 복과 풍요, 그 중에서도 특히 농업적인 이익에 크게 영향을 주는 성격이 두드려졌다. 때문에 <[[삼국유사]]>에 실린 미륵 관련 설화들이나, 현재까지 남은 민담들을 보면 돌미륵이 호수에서 솟구쳤다거나, 미륵불을 모시는 사찰을 지을 때 호수나 늪을 메워 만들었다던가 하는 창건설화나 미륵님께 기도를 올리니 좋은 일이 생겼다 등의 기복적 설화도 이런 영향이다 [[남북국시대]] [[통일신라]]에서는 삼국 유민들을 단합시키기 위해 [[아미타불]]과 [[관세음보살]]을 중심으로 한 정토신앙이 보급되면서 미륵신앙이 조금 주춤하다가 [[후삼국시대]]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다시 대두되기 시작하였고, [[궁예]]가 이 미륵신앙을 기초로 하여 '''[[태봉]]'''을 건설하였으나 잦은 실정과 [[옴 마니 반메 훔|망]][[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는가|언]]으로 [[왕건]]의 [[쿠데타]]에 의해 축출, [[고려]]가 건국된다. [[견훤]]을 비롯한 다른 [[호족(한국사)|호족]]들 역시 미륵신앙을 많이 이용하였고, 그 영향으로 고려시대에는 거대한 야외 석조 미륵불상이 유행하게 된다. 미륵 신앙은 고려 시대의 향도들의 매향[* 미륵에게 향을 공양하고자 향목을 바다 갯벌에 묻는 것.]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